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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여행 낙안읍성-역사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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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여행 낙안읍성-역사탐방


남도여행 낙안읍성-역사탐방

부산에서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약 3시간 정도 마음 놓고 달리면 섬진강 대교를 지나면 전라도 땅 광양만을 지나면서 순천시가 나타난다.

예로부터 음식맛 좋고 푸짐하기로 유명한 순천을 지나서 천혜의 갯벌과 광활한 갈대밭이 장관인 순천만을 둘러보고 과거가 고스란히 현재화하여 삶이 유지되는 조선시대 계획도시 낙안읍성을 답사한다.

낙안읍성은 성벽이 두텁고 걷기에 충분히 너른 보도로 구성되어서 걸으면서 읍성을 충분이 감상할수 있는 높이로서 성축을 거닐다 보면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가 마을들이 방문자로 하여금 마치 조선시대 어느 마을에 와 있는 착각을 느끼게 한다.

마을에는 관아도 있고 형장도 있고 방아간이나 육곳간등 조선시대 한 고을의 삶이 영위되는 모습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
그때 그시절 그 모습대로 지금도 방문자들에게 막걸리도 팔고 국수도 파는 주민들이 실제로 생업으로 종사하고 있다.

시끌벅적 주막엔 주모들이 바쁘게 현대인들에게 지짐이나 순천지방의 뛰어난 음식맛으로 방문자를 사로잡는다.

이 낙안읍성은 들판에 세워진 국내 유일한 야성(野城)으로서 잘 보존된 성곽안엔 100여 채의 초가가 돌담을 두르고 싸리문을 유지한 채 과거 그대로 현재생활을 하는 주거지역이며 문화재 보존 지역이다.

현재는 85세대 229명이 살고있는 낙안읍성은 가옥 하나하나가 그대로 과거이며 주민은 현대인이다.

역사적인 기록 근거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대동여지지(大同與地志), 여지도서(與地圖書),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 地理志)에 안타나 있고 단행본으로서 낙안읍지 읍선생 안합편(邑先生安合編)과 노인당지(老人堂誌)가 있다.


위 기록물의 요지를 간단히 정리하면;

1,삼한시대:마한(馬韓)의 54국 중 신분할국(臣墳活國).

2, 백제시대:분차(分嵯), 분사(分沙), 부사(夫沙)라고 불린 파지성(波知城),

3, 통일신라:경덕왕 16년에 분령군(分嶺郡)으로 조양(兆陽), 충렬(忠烈), 백주(栢舟), 동원(董原) 4개의 속현(屬縣 현 보성군 고흥군 일대) 임.

4, 고려시대:태조 23년(940년)에 양악(陽岳), 낙안(樂安)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후에 고려 헌종 9년(1018년)에 나주부(羅州府)에 소속되었다가 고려 명종 2년(117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뒤에 다시 지군(知郡)으로 승격됨.

5, 조선시대:세조 12년(1466년) 지군(知郡)에서 군수(郡守)로 고쳤으며 중종 10년(1515년) 군내에서 불미한 사건이 발생하여 현령(縣令)으로 격하되었다가 선조 8년(1575년)에 다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19세기말까지 낙안 군수는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 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했다.

순종 1년 (융희 2년) 1908년 10월 15일 칙령 제72호로 낙안군이 폐지되면서 순천군 낙안면이 되었고, 1949년 8월 14일 순천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승주군 낙안면이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하여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됨으로써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이 되었다.

구조:야성(野城)인 낙안읍성은 외탁(外托)과 내탁(內托)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인 협축(夾築)이 특징이다.

읍성의 역사 연대;
조선 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할 때 이 고장의 양혜공(襄惠公)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함.
인조 4년(1626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忠愍公)임경업(林慶業) 군수가 석성(石城)으로 개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는 세종 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 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있음으로 완전 석성 증축은 이때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낙안읍성의 규모;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서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虎患)이 잦아 폐쇄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으로서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瓮城)이 성문을 외워 감싸고 있다. 여장엔 활을 쏠 수 있도록 사방 1尺정도의 총안(銃眼)=사구(射口)가 있고 이 총안 역시 근 총(近銃)과 원총(遠銃)으로 나누어 있다. 또 여장이 타구(朶口)로 나뉘어 있고 성곽을 따라가면凸 형의 성곽이 있는데 이는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당초 6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곳만 남아 있다. (일부 복원함) 이 치성은 초소(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근세에 와서는 6.25사변 이후 많은 훼손을 당했으나 1983년 6월 14일 성과 마을(동내리, 남내리, 서내리)이 국내 최초로 함께 사적지(사적 제302호)로 지정이 되면서 1984년부터 3∼4년에 걸쳐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여장은 동문(낙풍루), 남문(쌍청루) 주변만 복원된 상태이고, 서문(낙추문) 옆 성곽에도 여장이 복원될 계획으로 있다.

그리고 낙안읍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지방계획도시로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현재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를 신청하고 낙안읍성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낙안읍성은 사적 제302호이며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일원의 마을과 이를 둘러싼 성곽을 말하는 것이다.
보호구역의 총면적은 성내 41,018평(135,597㎡)평과 성밖 50m까지의 26,472평(87,511㎡) 평을 포함하여 67,490평(223,108㎡) 평이다.

부산에서 출발하는 남도여행 낙안읍성 역사탐방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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